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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의 억울한 죽음에 감춰진 충격적인 진실

UDTIT 2020. 11. 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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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은 보통 '유명세'를 치른다고 하죠. 악플로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있고, 허위사실 및 루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스타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유명세는 아마 세계적인 스타일수록 더욱 심해질 텐데요.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한 스타가 루머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이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마이클잭슨

바로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입니다. 아마 마이클 잭슨을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어릴 때부터 수 아버지의 힘든 교육을 견뎌내며 가족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 그룹으로 데뷔를 했는데요. 잭슨 파이브의 메인보컬에서 그는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팝의 황제로 올라서게 됩니다.

 

잭슨파이브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는 잭슨의 형제인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랜디 잭슨, 그리고 마이클 잭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고작 7살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탄탄한 노래 실력으로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고 잭슨 파이브는 데뷔 앨범부터 노래 4곡이 연속으로 1등을 하며 커다란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당시 레코드사 사장인 베리 고디는 셋째 저메인 잭슨에게 자신의 딸 헤이즐을 시집을 보내며 잭슨 집안과 사돈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베리 고디는 저메인을 미끼로 잭슨 집안의 대소사 일에 사사건건 참견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 따르는 대우 문제와 이권 문제가 커지면서, 대우 문제가 불거져 잭슨 형제들과 아버지 조셉이 저메인을 그룹에서 제외하고 막내 랜디 잭슨을 가입시킵니다. 그리고 그룹 이름도 '잭슨스' 로 바뀝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변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마이클 잭슨을 응원하던 음악 선배인 다이애나 로스는 그에게 솔로 가수로서 전향할 것을 권유를 했습니다. 결국 마이클 잭슨은 1979년 21세에 나이에 아버지와 형들을 떠나 첫 솔로 앨범 'Off The Wall'를 발표하게 됩니다. 첫 솔로 앨범은 발매 당시 전 세계 1,100만 장이나 팔리며 대단한 기록을 세웠고 마이클 잭슨이 솔로로서의 거대한 서막을 서서히 열게 되었습니다.

 

마이클잭슨과 퀸시존스

첫 앨범을 성공적으로 마친 마이클 잭슨은 이후 인생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 중 하나인 '퀸시 존스'를 만나게 됩니다.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은 전력을 다 해 앨범을 준비했고 1982년 드디어 세상을 뒤흔든 앨범 'Thriller'가 나오게 됩니다.

 

 

'Thriller'의 수록곡 9곡 중 무려 7곡이 빌보트 톱10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무려 37주간 빌보드차트 앨범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빌보드 차트가 생긴 이래 가장 긴 기록이었는데요. 'Thriller'의 수록곡은 BiWanna Be Startin’ Somethin’ , Baby Be Mine, The Girl Is Mine, Thriller , Beat It, Billie Jean, Human Nature, P.Y.T. ,The Lady In My Life 가 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앨범을 내며 월드투어까지 순항 중이던 마이클 잭슨에게 1993년 충격적인 파문이 보도됩니다. 에번 챈들러라는 자동차 정비소 주인을 LA에서 알게 됐고 친절한 태도인 그와 가족 모두가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이클 잭슨과 챈들러 가족은 함께 라스베이거스, 모나코, 파리 여행 등을 다니며 친해지게 되었는데요.

 


이후 챈들러 가족들은 마이클 잭슨의 자택인 네버랜드에 한 번씩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에번 챈들러는 "내 아이가 마이클 잭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라고 고소를 했으며 마이클 잭슨은 경찰들에게 알몸 수사를 받는 등 수치스러운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조든 챈들러와 에번 챈들러

 오른쪽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에번 챈들러입니다. 왼쪽의 빨간 티셔츠를 입은 남자아이가 아들 조던 챈들러입니다. 에번 챈들러는 자신의 아들 조든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의 집에 놀러 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을 했는데요. 당시 마이클 조든은 명예훼손 죄로 고소를 하려고 했지만 'Dangerous'의 월드투어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합의금 약 2,330만 달러를 주고 무마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파문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사건 이후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에 한참 동안 칩거 생활을 했습니다. 추후에 밝혀졌지만 에번 챈들러가 가난을 탈피하고 싶어서 아들인 조던 챈들러에게 사기극을 벌인 거였습니다. 어렸던 조단은 아빠가 시키는 대로 마이클 잭슨이 자신에게 성추행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성인이 된 후 "마이클 잭슨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밝혔습니다.

 

마이클잭슨 앨범 'Invincible'

 

1993년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 합의로 마무리됐음에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와 의혹은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한참 이후 마이클 잭슨은 'Yor are not alone', 'Childhood','Stranger In Moscow' 등 좋은 노래를 냈지만 이전만큼 히트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후 또 한 번 혼신의 힘을 담은 앨범 'Invincible' 마저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03년 두 번째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파문이 터지게 됩니다.

 

마이클잭슨의 두 번 째 성추행 파문

바로 영국의 저널리스트 마틴 배셔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때문입니다. 마이클 잭슨은 그동안 진실의 왜곡과 루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배셔는 일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를 촬영을 요청했고 마이클 잭슨은 촬영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개빈 아르 비조라는 소년과의 촬영을 하는 장면은 악의적으로 편집하여 성추행 사건처럼 보이게 했고 개빈의 부모들도 처음에는 마이클 잭슨의 무혐의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서 마이클 잭슨이 아들을 성추행 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마이클 잭슨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됐고 법정에서 배심원의 만장일치로 무혐의 처리가 되었지만 마이클 잭슨에게 아동 성추행범이라는 주홍 글씨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THIS IS IT'

이후 마이클 잭슨은 장장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그 이후 2009년 3월 5일 'THIS IS IT'으로 런던에서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전 세계투어를 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요. 마이클 잭슨의 컴백은 오랜 시간 기다려온 팬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전 세계 티켓이 매진이 되고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처음 10회 예정이었던 공연을 50회까지 늘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끝내 'THIS IS IT' 콘서트에 오르지 못하고 준비과정과 인터뷰가 다큐멘터리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2009년 6월 25일 약물 과다 투여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치의의 처방에 따라 정맥주사로 매일 밤 프로포폴을 투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잠을 잘 못 자는 지경에 이르자 프로포폴과 미다졸람, 로라제 팜 등의 약물까지 맞고 있었고,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고, 마이클의 딸인 패리스 잭슨은 아버지를 기억하며 "최고의 아빠였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에는 5억 명이 넘는 사람이 접수를 했으며 미국 내에서만 3,000만 명이 시청을 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루머와 허망한 죽음은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는데요.

 

 

2019년은 6월 25일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 1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여전히 팬들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들으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스타였으며 감히 대중음악의 '클래식'이라 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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